군사분계선(MDL) 남쪽 우리 땅에서 북한군 대인지뢰가 발견됐다. 지난달 21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수색로를 개척하던 우리 장병들이 불의의 폭발로 피를 흘렸고, 현장 수색 결과 북한군이 사용하는 수지(플라스틱) 대인지뢰가 추가로 수습됐다.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 출석해 폭우에 따른 유실이 아닌 명백한 ‘매설’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현장 정밀조사를 마친 유엔군사령부의 결론 역시 단호했다. 북한의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다.
우리 영토 안에서 우리 군인이 부상을 입고, 북한군 대인지뢰의 MDL 이남 발견과 정전협정 위반이 명백하게 확인된 중대 안보 상황이다. 그런데 이 사태를 대하는 대한민국 통일부 장관의 첫 일성은 귀를 의심케 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0월 2일, 북한을 향해 대화를 제안했다. 북한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전제하면서도, 군 안팎과 여론에서 제기된 정동영 대북 확성기 논쟁의 핵심인 방송 재개에 대해서는 단칼에 선을 그었다. 정 장관의 입에서 나온 표현은 ‘무책임하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무책임하고, 무엇이 위험천만하다는 말인가. 확성기를 켜면 북한이 거칠게 반발하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까 봐 두려운 것인가. 북한의 최고존엄이 불쾌해할까 봐 눈치가 보인다는 뜻인가.
만약 상대방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쥘 수 있는 실효적 대응 카드를 지레 포기해 버린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은 무엇으로 북한의 다음 도발을 막아설 것인가.
확성기 방송 재개 자체가 유일무이한 정답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확성기보다 훨씬 효과적이면서도 충돌 위험을 정밀하게 통제할 수 있는 비책을 쥐고 있다면 당당하게 국민 앞에 설명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군사적 주권을 침해당한 피해 당사국의 주무 장관이, 침략자에게 부과할 대가를 고민하기도 전에 우리 스스로의 방어 기제를 ‘위험천만’하다고 셀프 봉인해 버리는 이 패배주의적 굴종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불과 11년 전, 똑같이 DMZ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복기해 보라.
2015년 8월, 북한군은 DMZ 남측 추진철책 통문 밑에 목함지뢰를 매설했고 우리 청년 장병 2명이 다리를 잃는 참극이 빚어졌다. 당시 정부는 비열한 도발을 규탄하며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동시에, 2004년 이후 11년간 멈춰 섰던 대북 확성기를 전격적으로 틀어쥐었다.
북한은 펄쩍 뛰었다.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뺌하며 확성기를 즉각 끄지 않으면 무차별 포격하겠다고 위협했고, 전방 부대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며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공갈에 물러서지 않고 확성기 볼륨을 유지했다.
그 팽팽한 힘의 균형 끝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북한은 판문점 협상에 나왔다. 무려 43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8월 25일 남북 공동합의문이 발표됐다. 북측은 DMZ 남측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우리 군인들이 다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북한 정권이 우리 군의 피해에 고개를 숙인 뒤에야 비로소 남측은 확성기를 껐고, 북한도 준전시상태를 해제했다.
도발 확인 → 상응하는 실질적 징벌(확성기 재개) → 긴장 고조 → 고위급 협상 → 북한의 유감 표명 → 확성기 중단. 이것이 바로 2015년 대한민국이 증명해 낸 억지와 협상의 정상적인 메커니즘이었다.

그런데 2026년 오늘의 풍경은 어떠한가. 북한제 대인지뢰가 MDL 남쪽에서 발견되고 유엔사가 정전협정 위반으로 못을 박았음에도, 북한은 반성은커녕 우리 군의 조사를 두고 ‘자작극’이라며 적반하장식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인 대한민국의 통일부 장관은 도발자를 꾸짖어 대가를 치르게 하기는커녕, 우리 군의 유력한 심리전 수단인 확성기 재개부터 ‘위험천만한 짓’이라고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11년 전 지뢰 도발 당시 발휘했던 국가적 기개와 안보 원칙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물론 2015년과 지금의 한반도 지형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북한의 고도화된 핵·미사일 전력과 신냉전 구도 속에서 군사적 충돌의 파급력을 면밀히 계산해야 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 장관의 설명이 필요하다. 확성기가 그토록 위험천만해서 쓸 수 없다면, 정부는 도대체 어떤 수단으로 북한의 불법 매설에 상응하는 뼈아픈 비용을 물릴 것인가. 우리 군인이 피를 흘렸는데, 유치한 자작극 프레임을 씌우는 저들에게 그저 사과를 ‘간청’하고 대화를 ‘구걸’하는 것으로 덮고 갈 셈인가.
정 장관의 안보관을 둘러싼 논란이 더욱 거세지는 데는 때마침 불거진 유럽 출장 논란도 한몫을 하고 있다. 정 장관은 갈등 조정과 평화 정책 공감대 확산을 명분으로 9월 28일부터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독일을 순방하는 일정을 짰다. 공식 외교 일정이 포함돼 있었으니 이를 무조건 ‘관광성 외유’로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미 우리 장병들이 DMZ에서 지뢰를 밟아 크게 다친 상태였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공직자의 우선순위는 시험대에 올랐다. 결국 비판 여론이 들끓자 일정을 축소하고 조기 귀국하는 촌극을 빚었다. 국민들은 묻고 있다. 국가의 안보가 뚫리고 군인이 부상을 입었을 때, 국무위원이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북한의 심기인가, 아니면 우리 장병들이 다시는 비열한 덫에 피 흘리지 않도록 철통같은 응징 태세를 확립하는 것인가.
평화는 중요하다. 대화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전략적 절제’와, 상대의 도발이 무서워 ‘스스로 방패와 창을 버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군대와 안보 자산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전쟁을 벌이기 위함이 아니라, 적이 감히 도발을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억제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억지력의 밑바탕에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원칙이 자리 잡고 있다. ‘선을 넘으면 반드시 감당 못 할 대가를 치른다’는 강력한 경고다.
상대가 화낼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손발을 묶는 순간, 억지력은 붕괴한다. 북한은 우리의 굴종을 평화의 제스처가 아니라 명백한 나약함으로 읽고 ‘이번에도 아무 탈 없겠지’라며 다음 도발의 좌표를 찍을 것이다.
2015년의 대한민국은 도발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한 뒤 당당하게 합의문에 도장을 찍었다. 2026년의 대한민국은 북한군 지뢰가 MDL 남쪽에서 발견된 상황에서도 ‘확성기를 켜면 위험하다’며 스스로 대응수단부터 제한하고 있다.
정동영 장관에게 다시 묻는다. 확성기조차 북한이 두려워 켤 수 없다면 당신은 무엇으로 국민의 생명과 영토를 지켜낼 것인가. 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유일한 원칙이라면, 도대체 대한민국의 안보 레드라인은 어디에 그어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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