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에 반하고 두 눈에 빠지고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초어스름까지
그녀의 하얀 눈만 바라보았다.
민주, 그녀의 얼음 맺힌 눈물을 두고 떠나 온 길로 되돌아 간다.
민주지산은 정말 오랜만에 오르는 산이다. 그 만큼 산을 향한 내 마음은 많이 설레었다.
지난 주 덕유산에서 본 상고대와 설경이 아직 가슴 깊이 여운을 드리우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산행객들은 도마령을 들머리로 잡고 각호산과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을 거쳐 황룡사를 거쳐 한천주차장으로 날머리를 잡는다. 물론 산 욕심이 많은 분들은 각호산 정상에 올라 진행방향의 반대편에 있는 배걸이봉을 들렀다가 후진해서 원 진행방향을 잡는 분들도 있다.
원점회귀를 하는 분들은 한천주차장에서 배걸이봉~각호산~민주지산~석기봉~삼도봉~황룡사~한천주차장으로 잡아도 무방하다. 다만 겨울에는 걸음이 조금 빠른 분들이나 가능하지 그렇지 않다면 필히 헤드렌턴이나 야간 안정 장비를 갖추고 가야 한다. 겨울은 눈과 미끄러움이 큰 변수로 작용해서 자칫 시간을 지체해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지산 종주는 5개의 봉우리를 함께 한다는 재미가 크다. 물론 필자는 4개의 봉우리만 택했다. 겨울 산 충분히 즐기면서 산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보도가 호재로 작용하길 원했고 또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도마령을 6km남짓 남겨둔 지점에서 더 이상 차량이 폭설로 운행이 불가하였다. 한천 주차장을 들머리로 잡을 생각을 하다가 돌아가는 시간과 그 쪽 사정도 만만하지는 않을 듯하여 아스팔트 길을 걸어 도마령을 그대로 들머리로 잡기로 결정했다.
당초 예정했던 산행거리는 12km였는데 아스팔트 도로를 6km를 걷게 되어 산행을 단축한다 해도 총 15km를 걷게 되기에 서둘러야 했다.
차에서 내려 바라 본 민주지산의 정상 부분은 하얗게 눈과 상고대로 쌓인 채로 산행객들의 발 길을 재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겨울 산은 충분한 준비를 하더라도 눈 등 변수로 인해 시간지체로 인한 산행 시간 초과가 쉽게 일어 나기 때문에 늘 긴장을 한다.
당일도 마찬 가지였다. 늘어난 거리를 아스팔트 도로에서 충분히 단축시키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도마령까지 달리다시피 속보로 걸었다.
1 시간 30여분 만에 도마령에 도착을 했다. 도마령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물 함모금을 마시고 한숨을 돌렸다.
이후 차근차근 민주 그녀를 올랐다.
긴 오르막과 짧은 평지가 반복하는 길을 한 시간 가까이 쉼 없이 올랐다. 고개 들어 보니 새 하얀 산 모퉁이 상고대가 바람과 구름을 다 받아들여 시리도록 하얀 빛으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산모퉁이여서 더욱 많은 상고개가 생긴 듯 하였다. 참으로 장관이었고 1시간 가까이 쉼 없이 오른 땀방울에 대한 보상인 것 같았다.
5 분여를 더 진행하여 각호산 정상에 올랐다. 각호산 정상은 돌출된 암석으로 되어있어 밧줄로 오르고 내리기 때문에 노령의 산행객들이나 팔 힘이 약한 여성들은 겨울철에는 피하는 것도 위험을 피하는 방법이다. 각호산 정상부분은 외길로 길이 상당히 좁기 때문에 산행객들이 많은 시간에 간다면 차례를 기다리느라 30여 분 이상 기다릴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체온이 급격히 저하되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있겠다.
각호산 정상에서 보는 사방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2.5km 전방에 보이는 민주지산을 비롯하여 석기봉, 삼도봉까지 줄줄이 머리에 눈을 이고 선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에 갈 길을 서둘렀다. 각호산을 내려서면 가파른 경사를 20여분 진행해야 한다. 미끄럽고 가파르기 때문에 안전사고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생처럼 한 동안 내려 왔으니 기다리는 건 오르막 아니겠는가?
또 다시 민주지산의 정상부분을 향해 부드럽게 오르는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지산까지의 이 길은 한 시간여 만에 끝나는 길이지만 눈과 상고대로 둘러 쌓여 있어 계속 아름다움과 함께 할 수 있어 그다지 힘든 줄도 모르고 지날 수 있다.
민주지산까지 가기에는 허기가 너무 졌다. 민주지산의 정상 아래 지점에서 바람이 잦아드는 곳을 택해 눈 밭에서 춥지만 달콤한 식사를 했다. 필자가 눈 속에서 식사를 하는 것을 본 산행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평지가 없어 엄두가 나지 않던 이들이 눈밭을 아랑곳 하지 않고 눈 속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필자를 보고 용기를 얻은 탓일 거다.
낯설지만 반가운 이들과 준비한 작은 음식을 나눠 먹고 안전한 산행하라는 덕담을 서로 주고 받으며 필자는 또 홀로 길을 나섰다.
잠시 후 만난 민주지산은 역시 100대명산에 들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감탄을 줄기차게 안겼다. 산행객들의 시린 손을 미안해하며 사진을 얻고 시간을 보니 버스 출발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석기봉과 삼도봉은 올 겨울 다시 와서 만나기로 하고 곧장 날머리로 진행하기로 했다.
도마령에서 정상적으로 산행을 시작하였다면 석기봉과 삼도봉의 백설을 누릴 수 있었을텐데 하고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들었다.
하지만 늘 산은 그자리 그대로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니 아쉽다고 무리할 필요가 있겠는가! 욕심 부리지 않고 좀 더 많은 여유를 가지고 하산 길로 들어 섰다. 민주지산에서 하산하는 길은 초반 30여 분은 계속 내리막 길이다. 그러나 눈이 많이 쌓인 탓에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아이젠이나 등산 스틱은 꼭 채비할 필요가 있다.
하산 길 도중에 만난 산행객들 일부는 눈썰매를 준비해 온 이들도 있었다. 필자는 즐거운 웃음으로 그들을 부러워했다. 은주암골과 물한 계곡을 내려가는 하산은 비교적 평이하고 쉬웠다. 황룡사에 다다르기까지는 많은 눈이 있어 푹신한 산행길이 무릎에도 참 편안하게 느껴졌다. 황룡사를 지나 한천 주차장에 다다르니 주민들이 곶감이며 밤이며 등등의 간식거리와 반찬거리를 팔고 있었다.
정겨운 간식을 먹으며 그들이 피운 난로에 몸을 녹이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석기봉과 삼도봉을 못 만나고 내려 온 아쉬움에 더 큰 미련이 남았다. 올 겨울이 가기 전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민주 그녀를 떠났다.
의상협찬: 아웃도어 전문브랜드 (주)알피니스트 www.alpini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