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ews 역사를 다시 묻다…조선 518년에서 대한민국까지, 익숙한 역사에 물음표를 붙이다

역사를 다시 묻다…조선 518년에서 대한민국까지, 익숙한 역사에 물음표를 붙이다

폄훼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한 장면으로 한 시대를 재단하지 않는다…사료가 말하는 데까지 따라가는 미디어원 장기 역사 프로젝트

우리는 역사를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사람이고, 연산군은 폭군이며, 광해군은 외교에 능했던 비운의 왕이라고 배웠다. 조선은 양반과 상민, 노비가 엄격하게 구분된 신분사회였고, 사색당파의 끝없는 당쟁과 성리학의 경직성이 결국 나라를 쇠퇴시켰다는 설명도 익숙하다.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이 나라를 구했고, 병자호란에서는 힘없는 조선이 청나라에 무너졌으며,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고 기억한다. 정조에 대해서는 개혁을 추진하다 독살됐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조선의 마지막에 이르면 무능한 왕과 부패한 양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설명과 강대한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다는 설명이 서로 충돌한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익숙했던 설명마다 물음표가 붙기 시작한다. 조선의 노비는 정말 주인이 마음대로 때리고 죽일 수 있는 존재였는가. 양반이라는 신분은 실제 삶에서도 언제나 절대적인 힘을 가졌는가. 가난한 양반과 부유한 평민이나 외거노비가 함께 존재했다면 조선의 신분사회를 단순한 피라미드로 설명해도 되는가. 과거시험은 실제로 신분 상승의 통로였는가. 세조의 왕위찬탈은 개인의 야심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연산군의 폭정 가운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후대의 이미지인가. 임진왜란에서 분조를 이끌며 전쟁 수습에 큰 역할을 했던 광해군은 왜 왕이 된 뒤에는 자신의 정권조차 지키지 못한 채 신하들에게 폐위됐는가.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흔히 조선군이 청나라 팔기군 앞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광교산과 김화처럼 조선군이 청군을 격퇴한 전투도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조선군 개개인의 전투력이 아니라 지휘와 기동, 정보와 보급, 국가 전체의 전쟁 수행 능력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청군은 왜 북방의 성들을 하나씩 공격하지 않고 거점을 우회해 곧바로 국왕을 향해 돌진했으며, 인조는 삼전도에서 정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장면을 조금만 넓혀보면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대왕과 조선 왕권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이미지
왕과 사대부, 관료제와 권력의 관계를 다시 살피는 ‘역사를 다시 묻다’ 조선편.

바로 여기에서 ‘역사를 다시 묻다’가 출발한다

이 연재의 목적은 조선을 변호하는 것도, 조선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다. 어느 왕을 성군으로 만들거나 폭군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한두 개의 사실을 끌어내 한 사람과 한 시대 전체를 단정하는 방식이다. 세종 때 노비제도가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세종을 ‘노예왕’으로 규정하거나, 퇴계 이황이 노비를 소유했다는 사실 하나로 그의 학문과 삶 전체를 위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역사적 검증이라기보다 현재의 가치판단에 가깝다. 반대로 세종과 퇴계가 역사적으로 큰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 시대의 신분차별과 노비제도를 축소해서도 안 된다.

조선의 신분제도 같은 방식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분명 평등사회가 아니었고 노비제와 신분차별이 존재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양반-중인-상민-천민’의 네 칸짜리 신분표가 500년 동안 똑같이 작동했던 것도 아니며, 사농공상을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동일한 법적 계급체계로 보는 것도 역사적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 신분과 경제력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고, 조선 후기에는 몰락한 양반과 부유한 상민,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하던 외거노비가 동시에 존재했다. 제도가 엄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의 사람들은 그 제도의 틈을 살아갔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 틈이다.

518년을 유지한 나라는 왜 마지막에 무너졌는가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 동안 존속했다. 518년을 유지했다고 해서 좋은 나라였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유지된 국가를 단순히 ‘사라졌어야 할 무능한 나라’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충분한 역사적 설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나라를 그렇게 오래 유지시켰는가. 국왕과 사대부가 권력을 나누고 견제했던 정치구조, 과거제를 통한 관료 선발, 지방 수령과 향촌사회의 결합, 조세와 토지제도, 구휼체계, 유교적 질서와 국가에 대한 정통성 등이 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봐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그렇게 오랫동안 국가를 지탱했던 제도가 왜 19세기에는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구조로 바뀌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조선을 오래 유지시킨 힘과 마지막에 조선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한 힘이 서로 연결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리즈는 왕과 정치만 다루지 않을 것이다. 가뭄과 홍수가 한 해 농사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었던 농경사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창과 상평창·환곡 같은 구휼제도가 왜 만들어졌고 그것이 왜 후대에는 수탈의 상징으로 변했는지, 양반은 향촌에서 무엇을 했으며 백성들은 세금과 군역을 얼마나 부담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과거시험이 오늘날의 국가시험과 얼마나 닮았는지, 여성의 상속권과 가족제도가 조선 전기와 후기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유교가 왜 제사와 장례·혼인·의복에까지 국가적 규범을 만들었는지도 물어볼 수 있다. 역사는 왕이 결정한 사건의 연속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근대 전환기 한반도 농촌에서 소달구지와 함께 이동하는 주민들의 모습
농업이 삶의 중심이었던 시대, 평범한 사람들은 자연재해와 흉년, 세금과 생계의 부담 속에서 일상을 이어갔다.

식민지 시대도 같은 방법으로 다시 본다

식민지 시대에 들어가도 방법은 달라지지 않는다. 조선이 내부적으로 실패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일본의 식민통치가 부당했다고 해서 그 시기에 일어난 모든 사회·경제적 변화를 없었던 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철도가 건설됐다면 철도의 존재 자체를 두고 근대화냐 수탈이냐를 먼저 판정할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에서 노선을 만들었고 무엇이 어디로 이동했으며 그 혜택과 비용을 누가 부담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쌀 생산량이 증가했다면 누가 생산했고 누가 토지를 소유했으며 어느 만큼이 일본으로 이출됐고 조선인의 소비와 생활은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면 출산율과 사망률, 의료와 위생, 인구조사의 변화와 이주까지 함께 분석해야 한다. 어느 숫자 하나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모든 현실을 부정하는 만능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독립운동 역시 신화와 폄훼 사이에서 다시 볼 것이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실제로 어떤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 피해는 어느 정도였는지, 만주의 독립군과 마적은 어떤 관계였는지,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같은 이념과 방법을 가졌는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선을 되찾는 운동’에서 ‘새로운 공화국을 만드는 운동’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검증할 것이다. 독립운동의 희생과 의미를 존중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은 전공을 보탤 필요는 없으며, 일부의 과장된 이야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독립운동 전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이동녕·김구·이승만, 김옥균·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와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과 얽혀 발전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흐름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독립을 말하면서도 왜 서로 다른 노선을 택했는지, 임시정부 안팎의 갈등은 무엇이었는지, 해방 이후에는 왜 다시 다른 길을 걸었는지까지 살펴볼 것이다. 인물의 한 시기만 떼어 영웅이나 반역자로 규정하지 않고, 그가 시대마다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따라갈 것이다.

해방 뒤의 역사도 같은 시선으로 이어간다. 일본인들은 어떻게 한반도를 떠났는지, 남겨진 집과 토지·공장은 누구에게 넘어갔는지, 적산기업은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친일파라는 말은 원래 누구를 가리켰으며 왜 반민특위는 실패했는지 살펴본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친일과 건국, 임시정부, 독립운동가 평가와 각종 기념 논쟁도 어느 진영의 구호를 반복하기보다 당시의 기록과 이후의 선택을 분리해서 볼 것이다.

폄훼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사료가 말하는 데까지

이 프로젝트가 지킬 원칙은 복잡하지 않다. 폄훼하지 않는다. 과장하지 않는다. 한 장면으로 한 시대를 재단하지 않는다. 사료가 말하는 데까지 간다.

우리가 가장 자주 던질 질문 역시 간단하다. “정말 그랬을까.” 세종은 정말 노예왕이었는가, 연산군은 정말 처음부터 광기의 폭군이었는가, 광해군은 정말 시대를 앞선 외교 천재였는가, 당쟁은 정말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었는가, 조선의 왕은 절대군주였는가, 과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는가, 조선군은 병자호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가, 조선은 정말 스스로 무너진 나라였는가. 익숙한 문장에서 마침표를 떼고 물음표를 붙이는 순간부터 역사는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역사를 다시 묻다」는 몇 편으로 끝낼 연재가 아니다. 조선만으로도 수백 개의 질문이 나올 수 있고, 개항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 해방과 대한민국의 형성까지 이어가면 수백 개의 질문이 더 생긴다. 따라서 전체 숫자를 먼저 정해놓고 내용을 잘게 쪼개지 않을 것이다. 좋은 질문이 있는 동안 계속한다. 하루 한 편씩, 때로는 광해군을 이야기하고 다음 날에는 외거노비를 살펴보며, 그다음에는 병자호란의 어느 전투를 복원하고 또 다른 날에는 식민지 조선의 평범한 농민 한 가족의 삶을 들여다볼 것이다. 연대순에 매이기보다 질문의 힘을 따라가되, 모든 기사는 시대와 주제별로 축적해 하나의 거대한 역사 아카이브로 만든다.

우리는 역사를 심판하기 위해 이 연재를 시작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오늘의 법정에 세워놓고 유죄와 무죄를 선고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 시대의 조건이 있었고, 그 안에서도 선택과 책임은 존재했다. 그래서 좋은 왕을 성인으로 만들지 않고, 나쁜 왕을 악마로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조선의 실패를 숨기지 않되 침략을 정당화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희생을 폄훼하지 않되 영웅담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결국 하나다. 한 번 더 묻고, 한 번 더 찾아보고, 기록이 말하는 만큼만 이야기하는 것.

역사는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그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디어원은 이제, 역사를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