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호르무즈 해협은 불바다인데, 대한민국 통치권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호르무즈 해협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 선박과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국가 최고 책임자의 대응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이고 꽃놀이’와 닮은 오늘의 풍경, 위기 속 리더십 부재가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 묻는다.

오사카성 전경 일본 성 건축 역사 유적 AI 생성 이미지
일본 오사카성 전경 — 권력의 중심이었던 성, 역사 속 흥망의 상징 (AI 생성 이미지)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초, 기록은 참혹했다. 자신이 다시 시작한 억지 전쟁으로 병사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고,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에서 흙을 파먹으며 버티던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갑자기 교토 다이고지에 벚나무 1,000그루를 새로 심으라 지시하고, 이 축제에 자신의 첩들을 모두 참석시키라 명한다. 심지어 첩들에게 이 축제에 입고 갈 최고급 옷감까지 미리 지급하며 호사스러운 의상을 짓게 했다.
바야흐로 축제는 시작되고, 거동이 불편한 히데요시의 가마 뒤로 본부인과 첩들이 탄 화려한 행렬이 속속 입장하여 흐드러지게 만개한 교토의 벚꽃을 만끽한다. 최전방의 비명은 외면한 채 벌인 이 정신 나간 축제 정확히 5개월 후, 히데요시는 죽었고 전쟁은 끝났다.
사선에서 살아 돌아온 장수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히데요시를 눈가림하며 국정을 농단한 이시다 미츠나리 일파를 죽이려 했던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결국 히데요시 사후, 이 내부의 깊은 갈등으로 인해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었고 정권은 도쿠가와로 넘어갔다. 리더가 현장의 고통을 잊고 ‘꽃구경’에 매몰된 대가는 이토록 잔인했다.
벚꽃 아래에서 시민들과 셀카를 찍는 정치인 모습
봄날의 벚꽃과 대비되는 국제 정세의 긴장

400여 년 전의 이 비극적 복선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 위로 기묘하게 겹쳐 보인다.

​우리 국민을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겠다며 대외적으로 온갖 위세를 떨치던 통치권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미사일이 오가는 호르무즈 해협에 우리 선박 26척과 국민 150여 명의 안위가 위협받은 지 한 달이 넘었건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보란 듯이 평화로운 일상에 침잠해 있다.
안보의 현실은 더욱 처참하다. 북한으로부터 우리가 차마 듣기 힘든 조롱 섞인 담화가 날아올 때는 제대로 된 항변 한마디 못 하더니, 최근 무인기 사건과 관련하여 김여정이 내뱉은 이른바 ‘사과에 대한 칭찬’ 한마디에는 마치 훈장이라도 받은 양 고무된 듯한 굴종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재명대통령이 반려견을 안고 일상 행보를 이어가는 모습
위기 속에서도 이어지는 평온한 일상 행보

국가의 자존심과 안보는 뒷전인 채, 한식이라며 성묘하고 강아지를 안고 선거 운동에 나서는 일상은 절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한가롭기만 하다.

이 와중에 일본 유조선은 무탈하게 해협을 왕래하고, 다카이치는 내년에 쓸 원유까지 미리 확보했다는 외신이 들려온다. 자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생존 전략을 대하는 리더십의 격차가 이토록 극명할 수 있는가.
교토의 벚꽃은 화사한 분홍빛으로 물들었지만, 그 뿌리는 울산성에서 흙을 씹으며 죽어간 병사들의 피눈물로 젖어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만끽하는 이 평화로운 봄날의 꽃향기 뒤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150여 명 국민의 비명을 보지 못하는 리더는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히데요시가 벚꽃 아래서 웃고 있던 그 봄날로부터 정확히 5개월 후,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역사는 잊은 자에게는 반복되고,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는 가차 없다.
호르무즈의 파도가 우리 국민을 덮치기 전에, 우리는 이 ‘5개월의 경고’를 뼈아프게 되새겨야 한다.
국가적 위기 앞에 방관자로 남은 통치권자에게 묻는다. 국민의 생명보다 귀한 꽃놀이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부록: 다이고의 꽃놀이(醍醐の花見)]

1598년 3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
다이고지에서 개최한 일본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벚꽃 축제. 정유재란 중 최전방 장수들이 극한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1,300여 명의 인원을 동원해 잔치를 벌였다.
이 사건은 이후 ‘무단파’ 장수들이 히데요시 사후 ‘문치파’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을 적으로 돌려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게 되는 결정적인 심리적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칼럼은 페이스북 게재 포스팅을 바탕으로 미디어원이 다시 작성한 것입니다. 윤종근 페친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