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 ㅣ 박예슬기자
삼성이 영남권에 약 6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발표의 숫자만 보면 대규모 지역 투자로 보이지만, 이번 구상의 본질은 더 분명하다. 영남권의 기존 제조 기반에 AX, 로봇, 차세대 배터리, AI 서버 부품, 첨단 조선 기술을 결합해 제조업 자체를 피지컬 AI 기반 산업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삼성은 경남 진주시 경상국립대에서 열린 ‘영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영남을 글로벌 피지컬 AI 혁신 클러스터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휴머노이드 로봇, 전고체 배터리, AI 서버용 패키지 기판과 MLCC, 최첨단 고부가가치선이 핵심 투자 분야로 제시됐다.
피지컬 AI는 화면 안의 인공지능을 넘어 실제 산업 현장, 로봇, 설비, 이동체, 조선소, 배터리 공정처럼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AI를 뜻한다. 생산라인이 스스로 데이터를 읽고, 로봇이 작업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며, 공장과 물류, 품질, 설비가 AI로 연결되는 구조다. 삼성은 이 전환을 영남권 주력 제조업에 적용하겠다는 방향을 잡았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지역은 구미다. 삼성전자와 삼성SDS는 구미에 휴머노이드 양산 체계와 로봇 데이터 팩토리를 구축하고, 제조·로봇 자동화 산업의 핵심 인프라인 AI 데이터센터도 신축할 계획이다. 구미는 오랫동안 전자 제조의 상징적 거점이었고, 삼성은 이 기반을 휴머노이드와 제조 AX의 마더팩토리로 끌어올리려 한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단순한 전시용 기술이 아니다. 제조 현장에서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고, 반복·위험·정밀 작업을 맡을 수 있는 미래 제조의 핵심 장치로 꼽힌다. 휴머노이드를 양산하려면 기계 설계, 센서, 배터리, 제어 소프트웨어, AI 학습 데이터, 공정 자동화가 모두 필요하다. 구미 투자가 로봇 데이터 팩토리와 AI 데이터센터를 함께 포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SDS의 역할도 중요하다. 제조업의 AX는 개별 장비를 자동화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생산 데이터, 설비 데이터, 품질 데이터, 물류 데이터를 하나의 시스템에서 처리하고, AI가 공장 운영의 효율을 높이는 구조가 필요하다. 구미가 휴머노이드와 제조 데이터의 거점이 되면, 영남권 전체 제조업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
울산은 삼성SDI의 차세대 배터리 투자 거점으로 제시됐다. 삼성SDI는 휴머노이드 로봇 등에 탑재되는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추진하고, 에너지저장장치용 LFP와 나트륨 배터리 양산도 확대할 예정이다. 배터리는 전기차뿐 아니라 로봇, 에너지저장장치, 산업 장비, 미래 모빌리티 전반의 핵심 부품이다.
전고체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 대신 고체 전해질을 쓰는 차세대 배터리로, 에너지 밀도와 안전성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아직 대량 양산과 가격 경쟁력 확보가 관건이지만, 상용화에 성공할 경우 전기차와 로봇 산업의 성능 한계를 크게 바꿀 수 있다. 삼성SDI가 울산에서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추진한다는 점은 영남권 산업벨트 안에 차세대 에너지 축을 세우겠다는 의미다.
BESS용 LFP와 나트륨 배터리 확대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AI 데이터센터와 자동화 공장, 로봇 산업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필요로 한다. 에너지저장장치는 전력망 안정화와 재생에너지 연계, 산업단지 에너지 효율화에 필수적이다. 울산의 배터리 투자는 단순한 셀 생산을 넘어 피지컬 AI 클러스터의 에너지 기반을 떠받치는 축이 될 수 있다.
부산은 삼성전기의 AI 서버용 패키지 기판과 MLCC 핵심 기지로 육성된다. AI 시대에는 데이터센터와 AI 서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고, 고성능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연결하고 작동시키는 패키지 기판과 MLCC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패키지 기판은 반도체와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핵심 부품이다. AI 서버는 고성능 GPU와 HBM, 고속 데이터 처리 장치가 결합되기 때문에 일반 서버보다 더 높은 신뢰성과 정밀한 부품 기술을 요구한다. 삼성전기가 부산을 고성능 패키지 기판과 고부가 MLCC의 마더라인으로 키운다는 것은 AI 인프라 부품 공급망의 국내 거점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MLCC는 전자회로에서 전류를 안정적으로 제어하는 핵심 수동부품이다. 스마트폰, 자동차, 서버, 로봇, 통신장비에 폭넓게 들어간다. AI 서버와 전장, 로봇 수요가 늘수록 고성능 MLCC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부산 투자는 전자부품 산업의 고도화뿐 아니라 영남권 피지컬 AI 클러스터의 부품 자립도를 높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거제는 삼성중공업의 첨단 조선 거점으로 제시됐다. 삼성중공업은 AI 팩토리 설비, 로봇, 자율운항 기술 관련 투자를 통해 첨단 3X 기반 자율형 조선소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여기서 3X는 디지털 전환, AI 전환, 로봇 전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조선업은 대표적인 노동집약·장치산업이다. 대형 선박 건조에는 용접, 도장, 블록 조립, 물류, 검사 등 수많은 공정이 필요하고, 작업 환경도 복잡하다. 이 때문에 로봇과 AI, 디지털 트윈이 결합될 경우 생산성과 안전성 개선 효과가 크다. 거제 조선소에 AI 팩토리와 로봇을 도입하는 것은 조선업의 제조 방식을 바꾸는 실험이기도 하다.
자율운항 기술도 고부가가치선 경쟁력과 연결된다. 앞으로의 선박은 단순 운송 수단이 아니라 센서, 통신, AI 운항 시스템이 결합된 이동형 플랫폼으로 진화한다. 삼성중공업이 거제에서 첨단 고부가가치선과 해양 인프라 건조 기지를 조성한다면, 영남권 피지컬 AI 클러스터는 육상 제조를 넘어 해양 산업까지 확장된다.
삼성은 AX와 로봇을 활용해 기존 산업을 최첨단 산업으로 전환하고, 양질의 일자리 20만 개를 창출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 대목은 단순 고용 수치보다 일자리의 성격을 함께 봐야 한다. 피지컬 AI 클러스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로봇 엔지니어, 배터리 연구·공정 인력, AI 데이터센터 운영 인력, 패키지 기판·MLCC 고급 제조 인력, 자율운항·조선 소프트웨어 인력이 필요하다.
영남권은 제조업 인프라가 강한 지역이지만, 미래 산업 인력의 재교육과 전환은 별도의 과제다. 기존 제조 인력이 AI와 로봇, 데이터 기반 제조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훈련 체계가 뒤따라야 한다. 지역 대학, 직업훈련기관, 협력사, 지방정부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대규모 투자가 지역 인재 생태계로 충분히 확산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번 계획의 성공 여부는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협력사까지 포함한 생산 생태계가 고도화되고, 지역 청년들이 영남권 안에서 미래 산업 일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삼성의 60조 투자는 지역 산업 전환의 출발점일 뿐, 실제 성과는 인력과 공급망, 교육, 연구개발이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같은 날 현대자동차그룹도 영남권에 42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제시했다. 현대차그룹이 AI 기반 자율주행차, 제조 AI, 수소, 전동화 부품, 항공·우주를 중심으로 영남권 미래차 산업벨트를 구상했다면, 삼성은 휴머노이드, 배터리, AI 서버 부품, 첨단 조선으로 피지컬 AI 클러스터를 제시했다.
두 그룹의 방향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영남권 제조업을 단순 생산기지로 남겨두지 않고, AI와 로봇, 에너지, 미래 모빌리티, 첨단 부품이 결합된 고부가 산업벨트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울산, 구미, 부산, 거제, 창원, 대구가 각각 다른 역할을 맡으며 하나의 첨단 제조권역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국 제조업의 과제는 생산비 경쟁에서 기술·데이터·자동화 경쟁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삼성의 영남권 60조 투자는 이 전환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피지컬 AI가 실제 공장과 조선소, 배터리 라인, 부품 생산라인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영남권은 다시 한 번 한국 산업 지도의 중심에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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