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기자 ㅣ 미디어원
SBS 금토드라마 ‘김부장’이 시청률과 화제성, 그리고 제작 방식에서 동시에 주목받고 있다. 방송 4회 만에 시청률 21.6%를 돌파하고 넷플릭스 비영어 TV쇼 1위에 오르며 흥행 흐름을 만든 가운데, 드라마 속 핵심 액션 시퀀스가 통째로 AI로 제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또 다른 논의를 불러왔다.
AI가 쓰인 장면은 특수요원 출신 주인공 김부장, 소지섭이 연기하는 인물의 과거를 보여주는 약 3분 분량의 시퀀스다. 제작사 측에 따르면 이 정도 길이의 시퀀스 전체가 AI로 제작된 것은 한국 드라마에서 처음 시도된 사례다. 단순한 배경 보정이나 짧은 컷의 실험이 아니라, 캐릭터 서사를 설명하는 핵심 장면을 AI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작업에는 국내 VFX 영상 전문가들이 기획하고 국내 기술력으로 만든 AI 콘텐츠 제작 플랫폼 ‘에이크론’이 사용됐다. AI가 드라마 제작의 주변 도구에 머물지 않고, 서사와 제작비, 일정, 표현 가능성을 동시에 바꾸는 창작 파이프라인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김부장’의 사례는 K-드라마 산업에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폭파·추격·수중 장면까지, 고비용 액션을 AI로 구현
‘김부장’에서 AI 영상이 쓰인 부분은 주인공이 북한 출신 포섭 공작원으로 북파돼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과거 시퀀스다. 해당 장면은 1회와 2회에 나뉘어 방영됐으며, 북한을 배경으로 한 폭파 장면, 눈 쌓인 도로와 터널 안 차량 추격전, 차량 전복, 난간을 뚫고 추락한 차량이 강물에 잠기는 수중 장면, 차량 인양 장면 등으로 구성됐다.
이 장면들은 실사 촬영으로 구현할 경우 제작 부담이 큰 장면들이다. 북한 배경을 설계하기 위한 미술 비용, 야외 로케이션, 폭파와 차량 전복을 위한 특수효과, 수중 촬영, 이후 CG와 VFX 후반 작업까지 고려하면 제작비와 일정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제작진이 AI 방식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중요한 것은 AI가 단순히 비용 절감 수단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 김부장의 과거는 캐릭터의 정체성과 현재의 행동을 설명하는 서사적 장치다. 이 장면이 빠지면 인물의 무게가 약해지고, 평범하게 처리하면 드라마의 장르적 에너지가 떨어질 수 있다. ‘김부장’은 이 장면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AI 제작이라는 선택지를 활용했다.
인물 일관성의 벽을 넘은 클로즈업
AI 영상 제작에서 가장 자주 지적되는 약점은 인물의 일관성이다. 컷이 바뀔 때 얼굴이 미세하게 달라지거나, 표정과 시선, 손과 몸의 형태가 흔들리는 문제는 특히 드라마와 영화 같은 서사 콘텐츠에서 치명적이다. 시청자는 캐릭터의 감정과 행동을 따라가야 하는데, 인물이 매 컷 달라 보이면 몰입이 깨진다.

‘김부장’의 AI 시퀀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 불안 요소를 비교적 적극적으로 다뤘다는 데 있다. 총격과 추격 같은 액션 컷뿐 아니라 인물 표정을 보여주는 클로즈업 컷까지 AI로 구성했다. 이는 AI 영상을 단순히 배경이나 원경 이미지로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감정선과 캐릭터 표현까지 담당하게 했다는 뜻이다.
물론 AI 제작 장면이 전통적인 실사 촬영과 완전히 같은 감각을 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제작진이 AI의 한계를 피해 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퀀스 전체의 리듬 안에서 AI 영상을 통제하려 했다는 점에서 산업적으로 의미가 있다. AI 영상이 ‘쓸 수 있는 컷’에서 ‘이어 붙여 서사를 만들 수 있는 시퀀스’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모피어스 스튜디오와 에이크론, VFX 전문가가 설계한 AI 파이프라인
‘김부장’의 AI 영상 제작은 모피어스 스튜디오가 맡았다. 모피어스 스튜디오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VFX 전문가들이 모여 설립한 회사로, 올해 2월 AI 콘텐츠 제작 플랫폼 ‘에이크론’을 론칭해 운영 중이다.
에이크론은 노드 시스템을 기반으로 프롬프트 입력부터 영상 완성까지의 작업을 하나의 캔버스에서 이어가는 통합형 플랫폼이다. 프롬프트 생성용 챗봇, 이미지 생성 모델, 영상 생성 모델, 사운드 모델 등 150개 이상의 AI 모델 가운데 필요한 모델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고, VFX 현장에서 축적된 영상 제작 노하우를 반영한 전문 유틸리티를 제공한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AI 영상 제작은 단순히 프롬프트를 잘 쓰는 문제만이 아니다. 컷의 연결성, 인물의 일관성, 조명과 질감, 카메라 움직임, 편집 리듬, 사운드와 장면의 결합까지 통제해야 상업 콘텐츠로 쓸 수 있다. 에이크론은 여러 AI 모델을 흩어진 도구처럼 쓰는 방식이 아니라, 영상 제작자가 하나의 작업 흐름 안에서 통제할 수 있도록 설계된 플랫폼이라는 점을 내세운다.
‘1947 보스톤’, ‘스윙키즈’, ‘감기’, ‘중천’ 등의 VFX 슈퍼바이저로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을 수상한 류재환 모피어스 스튜디오 부대표가 이번 AI 영상 작업을 총괄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AI가 영상 전문가의 경험을 대체했다기보다, VFX 전문가가 AI를 제작 도구로 통제해 상업 드라마의 장면을 만든 사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초짜리 컷’이 아니라 ‘시퀀스 전체’가 바뀌었다
이번 사례의 산업적 의미는 AI 사용 범위에 있다. 지금까지 영상 산업에서 AI는 콘셉트 이미지, 배경 보정, 짧은 샷의 실험, 프리비주얼, 홍보용 영상 등에서 먼저 활용돼 왔다. 그러나 상업 드라마 본편의 서사적 핵심 시퀀스 전체를 AI로 구현하는 것은 훨씬 높은 수준의 제작 통제를 요구한다.
류재환 부대표도 이번 작업의 의미를 몇 초짜리 VFX 컷을 AI로 대체한 수준이 아니라, 스토리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필요한 시퀀스 전체를 AI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제작진이 처음부터 AI 영상을 어떻게 쓸지 목표를 분명히 했기 때문에 완성도 있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 말은 AI 도입의 핵심이 기술 자체보다 기획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AI가 모든 장면을 자동으로 해결하는 만능 도구가 아니라, 어떤 장면을 왜 AI로 만들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연출과 제작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부장’은 주인공의 과거와 액션 스케일을 설명해야 하는 지점에서 AI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작품의 장르적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쓰였다.
제작비 절감보다 중요한 것은 표현 가능성
AI 영상 제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제작비 절감이다. 실제로 폭파, 추격, 수중, 전복 장면은 촬영과 후반 작업 비용이 높다. AI를 활용하면 일부 장면에서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물리적으로 촬영하기 어려운 배경이나 위험한 액션을 더 유연하게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작비 절감만 강조하면 AI 영상의 의미는 좁아진다. 더 중요한 것은 표현 가능성의 확장이다. 제작비나 일정 때문에 포기했을 장면을 서사 안에 넣을 수 있고, 인물의 과거와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더 밀도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중소 규모 제작사나 제한된 예산의 콘텐츠도 더 큰 스케일의 이미지를 시도할 수 있다.
물론 과제도 남아 있다. 배우의 초상권, 창작자의 저작권, AI 모델 학습 데이터, 제작 스태프의 역할 변화, 크레딧 표기와 책임 소재 등은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논의돼야 한다. AI가 영상 산업에 들어올수록 기술적 완성도뿐 아니라 제작 윤리와 계약 구조도 함께 정교해져야 한다.
K-드라마 제작 현장에 들어온 AI, 이제 실험에서 실무로
‘김부장’의 사례는 K-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AI가 실험을 넘어 실무 도구로 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AI 영상은 더 이상 별도의 데모 영상이나 홍보용 티저에만 머물지 않는다. 본편 안에서 캐릭터 서사를 설명하고, 장르 장면을 구현하며, 제작진의 창작 전략과 결합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이번 작업이 국내 VFX 전문가들이 만든 플랫폼으로 완성됐다는 점은 국내 엔터테크 산업에도 의미가 있다. 해외 AI 툴을 단순히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국내 제작 현장의 언어와 필요를 반영한 워크플로로 상업 드라마 본편 장면을 완성했다는 점에서다.
모피어스 스튜디오는 이번 제작 경험을 에이크론 고도화에 반영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AI 플랫폼이 실제 상업 콘텐츠 제작 경험을 통해 성능과 기능을 개선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많은 드라마와 영화, 광고, OTT 콘텐츠에서 유사한 방식이 시도될 가능성도 커졌다.
시청률과 기술 화제성, ‘김부장’이 남긴 두 가지 성과
‘김부장’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9시 50분에 방송된다. 작품은 초반부터 높은 시청률과 글로벌 플랫폼 성과를 기록하며 대중적 흥행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3분 시퀀스 풀 AI 제작이라는 제작 방식의 화제성이 더해지면서 콘텐츠 산업 안팎의 관심을 동시에 끌고 있다.
중요한 것은 AI가 드라마의 본질을 대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흥행의 중심에는 여전히 캐릭터, 서사, 배우, 연출이 있다. AI는 그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확장하고, 제작진이 필요로 한 장면을 구현하는 도구로 쓰였다. 이 균형이야말로 앞으로 영상 산업에서 AI가 자리 잡는 방식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김부장’의 3분 AI 시퀀스는 짧지만, 그 파장은 작지 않다. AI가 드라마 제작의 보조 도구를 넘어 서사적 장면을 구성하는 실무 파이프라인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K-드라마의 다음 경쟁력은 좋은 이야기와 배우, 연출에 더해 새로운 제작 기술을 얼마나 현명하게 붙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김부장’은 그 변화가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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