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기자 ㅣ 미디어원
국내 자율운항선박 기술이 제도권 실증 단계로 들어섰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KRISO는 자율운항선박법에 따라 국내 첫 운항 승인을 획득한 자율운항 시험선 ‘해양누리호’가 승인 이후 첫 시범운항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자율운항선박이 법적 승인 체계 안에서 실해역 운항에 나선 첫 사례다.
이번 성과는 단순히 시험선 한 척이 바다에 나갔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국내 자율운항선박 실증은 규제샌드박스 등을 통해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자율운항선박법 시행 이후 운항 승인, 안전성 평가, 관계기관 검토와 심의를 거쳐 실해역 실증이 이뤄지면서, 자율운항선박 기술은 제도 밖 실험에서 제도 안 검증으로 이동하게 됐다.
자율운항선박법 시행 이후 첫 운항 승인
자율운항선박은 AI 기술과 디지털 전환이 해양 산업으로 확장되면서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개발하는 분야다. 그러나 기술 개발만으로는 상용화에 도달하기 어렵다. 실제 바다에서 선박이 어떤 상황을 만나고, 어떤 판단을 내리며, 기존 선박과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실해역 실증은 자율운항선박 기술의 신뢰성과 안전성을 검증하는 핵심 과정이다.

해양수산부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실해역 실증을 지원하기 위해 실증 특례제도를 담은 ‘자율운항선박 개발 및 상용화 촉진에 관한 법률’을 2025년 시행했다. 이 법은 자율운항선박 기술이 실험실과 제한 구역에 머물지 않고 실제 운항 환경에서 검증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KRISO는 이 제도에 따라 자율운항 시험선 해양누리호의 운항 승인을 신청했고, 관계기관 검토와 심의를 거쳐 국내 첫 운항 승인을 획득했다. 해양누리호는 자율운항시스템과 관련 기자재에 대한 안전성 평가 등을 거쳐 운항 승인 기준을 모두 충족했다. 승인 기간은 2026년 6월 29일부터 2027년 11월 30일까지다.
규제샌드박스에서 제도권 실증으로
이번 시범운항이 중요한 이유는 국내 자율운항선박 실증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규제샌드박스는 신기술을 제한된 조건에서 시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유용한 장치지만, 산업 전체가 지속적으로 데이터를 쌓고 상용화로 나아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율운항선박처럼 안전과 해상교통, 국제 규범이 모두 얽힌 분야에서는 더 체계적인 승인과 실증 체계가 필요하다.
해양누리호의 운항 승인은 이 전환을 상징한다. 법에 따른 승인 절차를 거쳐 안전성 평가를 통과하고, 이후 항차별 세부 운영 계획에 따라 관계기관과 협의하며 실증을 추진하는 구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는 개별 기술의 성공 여부를 넘어 자율운항선박 산업 생태계가 필요한 공공 실증 기반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KRISO는 이번 승인을 바탕으로 통항량이 적은 해역부터 복잡한 연안 해역까지 실증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자율운항선박은 조용한 해역에서만 잘 움직여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 상용화를 위해서는 선박이 많은 연안, 항만 주변, 다양한 기상과 해상 조건에서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어야 한다.
해양누리호, 산업계 기술 검증을 돕는 공공 실증 플랫폼
KRISO가 해양누리호에 기대하는 역할은 자체 연구를 넘어선다. 해양누리호는 산업계와 연구기관이 개발하는 자율운항 요소기술과 기자재의 신뢰성 검증을 지원하는 공공 실증 플랫폼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자율운항 기술은 항법, 인지, 판단, 제어, 통신, 원격 관제, 사이버보안, 선박 기자재가 복합적으로 맞물려야 완성된다.
개별 기업이 모든 실증 환경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특히 실해역에서 안전하게 데이터를 확보하고, 관계기관 협의 아래 반복 검증을 진행하는 것은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공공 연구기관이 검증 플랫폼을 운영하면 산업계는 자율운항 요소기술을 실제 운항 환경에서 시험하고 개선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쌓이는 데이터도 중요하다. 자율운항선박은 다양한 운항 환경에서의 데이터가 많을수록 기술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통항량, 파고, 기상, 장애물, 선박 간 거리, 자동 제어 결과, 원격 관제 판단 등이 축적되면 국내 기술 고도화뿐 아니라 안전 기준과 운항 규정 마련에도 활용될 수 있다.
국제표준과 국제규범 논의의 근거자료 확보
자율운항선박은 국내 기술 경쟁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박은 본질적으로 국제 운송과 해상 규범의 영역에 놓여 있다. 자율운항선박이 상용화되려면 각국의 기술 수준뿐 아니라 국제표준, 안전 규정, 책임 구조, 해상충돌 예방 규칙과의 관계가 함께 정리돼야 한다.
KRISO는 해양누리호 실증을 통해 확보한 데이터를 국제표준과 국제규범 마련을 위한 근거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실제 운항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율운항선박의 안전성, 운항 조건, 시스템 요구사항을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가 국제 논의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조선·해운·해양기자재 산업 경쟁력과도 연결된다. 자율운항선박은 선박 건조 기술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센서, 통신, 제어, 법제도, 항만 인프라가 함께 움직이는 분야다. 국제표준이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 실증 데이터를 확보하는 국가는 향후 시장과 규범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울산항 운항해역 지정 지원에 이어 첫 운항 승인까지
KRISO는 지난해 울산시의 운항해역 지정 신청을 정책적·기술적으로 지원해 울산항 일대가 국내 제1호 자율운항선박 운항해역으로 지정되는 데 기여한 바 있다. 이번에는 해양누리호가 국내 첫 운항 승인을 획득하면서 제도권 실증 수행과 지원 역량을 한층 강화하게 됐다.
운항해역 지정과 운항 승인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운항해역 지정이 자율운항선박이 실증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이라면, 운항 승인은 특정 선박과 시스템이 안전성 평가와 기준을 충족해 실제 운항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절차다. KRISO가 두 과정 모두에 관여했다는 것은 국내 자율운항선박 실증 체계 구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근태 KRISO 자율운항선박실증연구센터장은 지난해 국내 제1호 자율운항선박 운항해역 지정 지원에 이어 올해 제도권 실증 기반까지 확보하면서 보다 체계적인 실증을 통해 자율운항 기술을 고도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양한 운항 환경에서 축적되는 데이터와 운항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 신뢰성을 높이고 국제표준 개발과 국내 산업계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겠다고 설명했다.
자율운항선박 상용화, 기술보다 검증 체계가 관건
자율운항선박의 상용화는 기술 시연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선박이 스스로 항로를 인식하고 회피 판단을 내리며, 기존 유인 선박과 안전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항만과 연안, 복잡한 통항 환경, 기상 악화, 통신 지연, 센서 오류 등 다양한 변수에 대응하는 검증 체계가 필요하다.
해양누리호의 첫 시범운항은 바로 이 검증의 출발점이다. 실해역 데이터를 쌓고, 산업계 기술을 검증하며, 법과 제도 안에서 운항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이 이어져야 한다. 자율운항선박은 조선산업의 다음 경쟁축이면서 동시에 해양 안전과 국제 규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홍기용 KRISO 소장은 이번 성과가 우리나라 자율운항선박 기술의 제도권 실증이 본격화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KRISO는 앞으로도 산업계와 함께 다양한 운항 환경에서 실증 데이터와 운항 경험을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율운항 기술의 상용화와 국제 경쟁력 강화를 지원할 계획이다.
국내 첫 운항 승인을 받은 해양누리호의 시범운항은 한국 자율운항선박 산업의 중요한 이정표다. 이제 경쟁은 기술 보유 여부를 넘어, 누가 더 안전하고 신뢰도 높은 실증 데이터를 확보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해양누리호가 쌓아갈 항적은 국내 자율운항선박 기술이 제도와 시장, 국제표준으로 나아가는 실제 경로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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