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12년 ‘우산국’ 우리나라 되다
지난번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힌 바 있듯이 옛날 우리나라에는 두 개의 부족국가가 있었다 . 화산섬인 탐라국 ( 제주도 ) 과 우산국 ( 울릉 + 도고 ) 이었다 . 그런데 그 가운데 ‘ 우산국 ‘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 년 ( 서기 512 년 ) 을 보면 다음과 같다 .
‘… 여름 6 월에 우산국이 귀복 ( 歸服 ) 이라 …’ 로 시작하여 아주 자세히 적고 있다 .
즉 우산국은 명주 ( 강원도 ) 동쪽에 있으며 그 이름은 울릉도라 , 바다 건너 거리 1 백리인바 , 몹시 인심이 핍박하여 복종하질 않는 성격이다 .
육지에 있는 하슬라주 ( 강릉 ) 의 군주 ( 軍主 ) 인 이사부 ( 異斯夫 ) 로 하여금 군사의 힘으로는 항복받기가 어려움으로 꾀를 부리게 했다 .
나뭇가지로 무서운 짐승인 ‘ 사자 ‘ 를 많이 만들어 큰 배에 가득 싣고 , ‘ 우산국 ‘ 에 이르러 외치되 ~ ‘ …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무서운 이 사자들을 섬으로 올라가게 하여 짓밟아 죽이고 말겠다 !’ 하니 , 크게 놀라 항복하고 말았었단다 .
그 이후 ‘ 우산국 ’ 이란 존재는 되살아나질 못한 채 , 신라에 완전히 귀속되고 말았다 . 신라 귀속이후 본토민과 섬사람들 사이에는 활달한 개척의 길이 열리게 된다 . 계절에 따라 본토에 해산물을 받치는 양이 많아지자 신라는 옛 ‘ 우산국 ’ 에 대하여 더욱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
한편 신라와 동해안과는 밀접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항로의 개척과 동시에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울릉과 돌섬 ( 독도 ) 을 자주 오가게 했다 . 그 뿐만 아니라 섬사람들로 하여금 신라의 고유한 정신을 이어 받도록 하고 그의 역사적 이념과 민속까지 되살리는 의미에서 특히 소중히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
이 때부터 울릉에는 육지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 ‘ 우산 ’ 즉 오늘의 독도는 자연적으로 신라 어민들의 소중한 어로작업의 항로지로서 개척되기에 이른 것이다 .
옛날부터 우산국인들이 생활 근거지로 중요시 했던 울릉은 더욱 소중한 중심섬이 되었고 우산은 해산물의 채취지로서 신라인들에 의하여 더욱 개척되기에 이른다 .
한 때는 우산을 우릉 ( 羽陵 ) 으로 쓴 적도 있었다 . 이는 별다른 뜻은 없고 , 그저 어민들간에 썼던 것이라 한다 .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로 된 것이 신라 지증왕 13 년이면 서기로 512 년이니 벌써 1 천 5 백 여년 전의 일이다 .
그런데 마음이 음침한 일제는 지금도 ‘ 독도 ’ 가 자기네 섬 다케시마 ( 竹島 ) 라 잔꾀를 부리고 있다 .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
지난 2009 년 1 월 12 일자 ‘ 한겨례신문 ’ 에서 일본국의 현행법령 두 건 ( 件 ) 에서 확인된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스스로 인증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1960 년 시행한 ‘ 대장성령 제 43 호 ’ 와 1968 년 시행한 ‘ 대장성령 제 37 호 ’ 를 찾아낸 사람은 미국에 있는 법률사무소 선임연구원인 ‘ 최재원 ’ 씨 임을 알아냈다 .
최 연구원은 일본법령 테이터베이스인 ‘ 웨스트로 저팬 ’(www.westlawjapan.com) 등을 활용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 이 사실을 일본정부 관계자에 물으니 “ 두 법령의 존재는 정부가 이미 파악해 알고 있으나 , 지금은 구체적 분석을 하고 있는 중이다 .” 라 하면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있었다 .
‘ 대장성령 제 43 호 ’ 와 ‘ 대장성령 제 37 호 ’ 는 스스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이 두 법령은 현재에도 법적으로 유효한 것임은 물론이다 .
‘ 옛 ‘ 우산국 ’ 을 찾아서’를 시작하면서 큰 신세를 진 곳이 있다 . 먼저 ‘ 독도박물관 ’ 이다 . 특히 이승진 관장의 도움이 많았다 . 독도와 울릉도의 역사 , 민속 , 현황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 아름다운 섬 , 독도 그리고 울릉도 』 는 참으로 고마웠다 .
변변치 않은 나의 글 보다는 이 책을 여러분께서도 꼭 보아야겠다 . 나도 이책을 참고 삼아 ‘옛 우산국을 찾아서’를 엮어 나갈 것이다 .
글: 심우성/민속사학자 전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