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노비제, ‘노예국가’라는 단정은 위험하다

(미디어원)최근 몇 년 조선의 노비제를 둘러싼 글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끊임없이 유통된다. 문제는 이 논의가 ‘논쟁’이라기보다, 한쪽 방향으로만 질주하는 일방적 규정에 가깝다는 점이다. 조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동족을 노예로 부린 야만 국가”로 단정하고, 노비제 하나로 조선 전체를 폐기처분하듯 결론낸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단정이다. 단정은 생각을 멈추게 하고, 복잡한 현실을 한 장면으로 눌러버린다.
노비제는 분명 불평등한 제도였다. 인간이 인간에게 예속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 우리의 눈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까지는 누구도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다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불평등한 제도를 비판하는 일과, 그 제도로 한 시대 전체를 “야만”으로 판결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조선의 사회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노비제만 떼어내어 악마화하면, 그 순간부터 역사는 분석이 아니라 처벌, 부관참시가 된다.

조선은 농경국가였다. 생산의 중심은 토지였고, 삶은 하늘의 변덕에 매달려 있었다. 흉년이 들면 세금은 남고 먹을 것은 사라졌다. “나라님도 가난은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지는 배경도 결국 이 조건 위에 있다. 농업 외 대안 산업이 빈약하고 국가의 구휼 능력도 제한된 사회에서 ‘예속’은 개인의 악의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존 구조로 굳어진다. 노비제는 그 구조 위에서 작동한 현실이었다.
노비를 오늘날의 “노예”와 단순히 등치시키는 방식도 흔하다. 그러나 비교는 신중해야 한다. 조선의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동시에 호적·신분·역(役)·가구 질서 속에 편입된 법적 지위를 가진 존재였다.
노비 소생의 신분을 누구에게 귀속시키느냐를 둘러싼 종부·종모 논쟁이 반복된 것도, 이것이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국가 재정과 역 부담, 사회적 분쟁과 연결된 제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해서 백성을 문맹으로 만들고 노비를 늘렸다”는 결론으로만 몰아가면, 그 시대가 떠안은 통치 비용과 현실은 통째로 사라진다.

또 하나. 노비는 “말할 권리조차 없는 존재였던가”라는 문제다.
조선 사회에는 신분을 둘러싼 분쟁과 다툼이 존재했고, 노비 관련 소송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소송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노비제가 ‘정의로운 제도’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노비제가 무법천지의 폭력만으로 굴러간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과 재판 체계 속에서 움직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단선적 악마화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회도 완전히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천 년 뒤의 미래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를 노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장과 오너가 위에 있고, 그 아래에서 생존을 걸고 일하는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다. 과거에는 신분제라는 이름으로 굳어졌고, 지금은 고용과 자본, 지분과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할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이라는 이름이었고 현대사회에는 ‘직원’이라는 이름일 뿐이라는 말이 지나친 비약일까.

말할 수 있는 통로가 늘어난 것과 예속이 사라진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 노동법이 생기고, 노조가 생기고, 거리의 시위가 생긴다.
불평등은 인간 사회의 상수이며, 제도의 진화는 그 불평등을 줄이고 조정하려는 끝없는 싸움이다.
조선의 노비제는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조선을 ‘노예국가’라는 한 줄로 단정하고 폐기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과거를 모욕함으로써 현재를 깨끗하게 만들 수 없다. 과거를 단정으로 재판하는 순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예속 구조 또한 보지 못한다.
역사란 바로 자신의 조상을 욕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반복하는 권력의 형태를 읽고 다음 사회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