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ews 경제 호르무즈 위기, 한국은 수송 경로를 바꿨다… 원유 확보와 사재기 금지의 의미

[기획] 호르무즈 위기, 한국은 수송 경로를 바꿨다… 원유 확보와 사재기 금지의 의미

4월 14일 사재기 금지, 15일 우회 확보 발표… 가격 아닌 공급 구조 흔들리기 시작

긴장된 해상 수송로를 항해하는 대형 유조선 모습
호르무즈 해협 위기는 유가를 넘어 원유 수송 경로와 공급 구조 자체를 흔들고 있다.

4월 14일 사재기 금지, 15일 우회 확보 발표… 가격 아닌 공급 구조 흔들리기 시작

이정찬 기자 ㅣ 미디어원

한국 정부가 4월 14일 석유화학 원료 사재기 금지 조치를 내놨다. 적용 시점은 4월 15일 0시부터 6월 30일까지다. 대상은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벤젠, 톨루엔, 자일렌 등 나프타 계열 7개 기초유분이다. 정부는 전년 같은 기간 재고보다 80%를 넘겨 쌓아두지 못하도록 했다. 중동 전쟁 여파가 실제 공급 차질과 시장 불안으로 번질 가능성을 보고 먼저 손을 댄 것이다.

하루 뒤인 4월 15일에는 더 큰 발표가 나왔다. 대통령실은 한국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않는 경로로 연말까지 원유 2억7천3백만 배럴과 나프타 210만 톤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이 물량이 통상 조건 기준으로 원유는 3개월 이상, 나프타는 약 1개월가량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4~5월 중 홍해 항구를 통해 5천만 배럴을 보내고 연말까지 2억 배럴을 추가로 우선 공급하기로 했으며, 카자흐스탄이 1천8백만 배럴, 오만이 5백만 배럴과 나프타 160만 톤을 공급하기로 했다는 내용도 함께 공개됐다.

이 두 조치를 따로 보면 안 된다. 14일의 사재기 금지와 15일의 우회 확보는 한 세트다. 정부가 본 것은 유가만이 아니다. 공급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지난해 한국 원유 수입의 61%, 나프타 수입의 54%가 지나는 통로였다. 이런 통로가 흔들리면 시장은 먼저 재고를 쌓으려 하고, 정부는 그 움직임을 막으려 한다. 그와 동시에 우회 물량을 확보해 숨통을 틔운다. 이번 조치는 바로 그 순서로 나왔다.

사재기를 왜 막았는지도 분명하다. 공급이 불안할 때 시장은 늘 먼저 움직인다. 일부 업체가 원료를 더 쥐기 시작하면 다른 업체도 따라붙는다. 실제 부족이 오기 전인데도 재고가 말라 보이고, 가격은 그 기대만으로 먼저 뛴다. 정부가 이번에 재고 상한을 건 이유는 바로 그 선점 경쟁을 잘라내기 위해서다. 산업부는 추가로 의료용품과 생필품 분야까지 확산 여부를 보며 비슷한 조치를 검토할 수 있다고 했고, 총리도 15일 중동 관련 공급 불안에 대응해 사재기 단속을 지시했다.

영향은 정유와 석유화학에서 끝나지 않는다. 반도체부터 받는다. 반도체는 전력비 부담이 큰 산업이고, 클린룸 가동과 공정 유지에 막대한 에너지가 든다. 여기에 화학 소재와 특수가스, 각종 포장재와 물류비까지 얹힌다. 원유와 나프타 계열 원료가 흔들리면 플라스틱 패키징과 산업용 소재 가격이 먼저 움직이고, 그 부담은 제조원가에 반영된다. 지금 아시아 전역에서 플라스틱 포장재 부족과 가격 상승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보도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자동차도 다르지 않다. 자동차는 철강과 알루미늄만으로 만드는 상품이 아니다. 플라스틱, 도장재, 화학소재, 타이어, 물류가 다 묶여 있다. 유가가 오르면 물류비가 먼저 뛴다. 공급이 불안해지면 부품 조달이 꼬인다. 완성차 한 대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 일정과 수출 인도 일정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한국 산업은 수출 중심이고, 자동차는 그 한복판에 있다. 공급망이 흔들릴 때 체감이 빠른 이유다.

생활물가로도 번진다. 정부가 의료용품과 생필품 분야까지 주시하겠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유와 석유화학 원료는 포장재와 생활소재에 직접 들어간다. 병원에서 쓰는 주사기와 바늘 사재기까지 정부가 별도로 막은 것도 같은 배경이다. 제조업 내부 문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국민 생활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교통비, 난방비, 생활용품 가격이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항공과 관광도 결국 영향을 받는다. 항공유 가격이 오르면 운임이 오른다. 장거리 노선이 먼저 흔들린다. 물류와 여객이 함께 압박을 받는다. 이 대목은 여행레저 산업 문제이기도 하지만, 먼저는 산업 비용의 문제다. 유가가 오르고 공급이 불안해지면 항공은 비용 구조상 바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 여파가 뒤늦게 여행 수요와 공항 소비로 이어진다. 먼저 흔들리는 것은 관광이 아니라 에너지와 운송이다. 관광은 그 뒤를 따라간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확보했다”는 말만 보는 것이 아니다. 왜 우회 확보를 했는지, 왜 사재기 금지까지 동시에 꺼냈는지를 봐야 한다. 정상적인 시장이라면 정부가 이틀 연속으로 이런 조치를 내놓기 어렵다. 이번에는 그렇게 했다. 그만큼 정부도 공급 불안이 현실의 문제라고 본 것이다. 가격은 숫자로 보이지만, 공급 구조의 흔들림은 조치에서 먼저 드러난다. 4월 14일의 금지 조치와 15일의 우회 확보 발표는 바로 그 신호다.

한국의 원유 우회 확보와 사재기 금지 조치는 중동 전쟁의 충격이 이제 유가를 넘어 공급망과 산업 전반으로 번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경고다. 다만 이런 때일수록 시장은 더 냉정해야 한다. 가격 불안이 보인다고 모두가 먼저 사들이기 시작하면 위기는 더 빨리 현실이 된다. 정부는 공급 상황을 투명하게 알리고 사재기를 엄격히 막아야 하며, 기업과 소비자 역시 공포가 아니라 정보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위기 국면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부족 자체보다, 부족할 것이라는 불안이 시장을 먼저 무너뜨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