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남부국경선 주장은 군사분계선, 즉 MDL을 사실상 국경처럼 굳히려는 정치·군사적 공세다. 한국은 이를 국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접경 충돌을 막기 위한 통신선, 통보 절차, 우발 월선 처리, 해상 충돌 방지 등 새 경계 관리 합의는 더 미루기 어려워졌다.
북한이 말하는 남부국경선은 단순한 표현 변경이 아니다. 정전협정이 남긴 군사적 관리선을 영토와 주권의 언어로 바꾸려는 시도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원식 연구위원은 최근 이슈브리프에서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남부국경선으로 재정의하고 있으며, 이는 정전협정 체제를 흔들려는 전략적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정전협정상 군사분계선은 국경이 아니다. 1953년 정전협정은 MDL을 기준으로 남북 양측이 각각 2km씩 물러나 비무장지대를 만들도록 했다. 그 목적은 영토 확정이 아니라 적대행위 재개를 막기 위한 군사적 완충이었다. 북한이 이 선을 국경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발적 월선이나 접경 공사, 감시장비 운용까지 정전 관리가 아니라 영토 침범의 문제로 바뀔 수 있다.

이 변화는 이미 현장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북한은 2023년 말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규정했고, 이후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철도 연결 구간을 차단하며 접경지역에 방벽과 지뢰, 장애물을 늘렸다. 남북을 잇던 상징적 통로는 끊겼고, 접경의 군사적 긴장도 높아졌다.
한국 정부가 맞닥뜨린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은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두 국가론과 남부국경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이 이미 통일 담론을 버리고 적대국가론을 앞세우는 상황에서, 기존 원칙만 반복한다고 접경의 위험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북한 주장을 인정하는 문제와 접경 충돌을 막는 문제를 분리하는 데 있다. 남부국경선을 국경으로 승인할 수는 없지만, 그 선에서 총성이 나지 않도록 관리 규칙을 만들 수는 있다. 통신선 복원, 사전 통보 절차, 접경 공사 기준, 우발 월선 처리, 해상 충돌 방지 장치 등은 국경 인정과 별개의 문제다. 이는 북한에 끌려가는 협상이 아니라 국민 생명과 군사적 안정성을 지키는 현실적 안보 조치다.
동서독 기본조약이 다시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독과 동독은 1972년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분단 현실을 제도적으로 관리했다. 서독은 통일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시에 동독과의 관계를 방치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체제를 전면 승인하는 문제와 실제 충돌을 줄이는 문제를 분리했고, 그 과정에서 교류와 관리의 통로를 열었다.

물론 한반도와 독일은 다르다. 동서독에는 핵무기가 없었고, 지금의 한반도처럼 복합적인 군사 대치 구도도 없었다. 독일 사례를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그러나 분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충돌을 줄이는 제도적 언어를 찾았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한국 사회도 이제 불편한 논의를 피하기 어렵다. 통일은 헌법적 지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남북관계의 우선 과제는 당장의 충돌을 막는 일에 더 가까워졌다. 북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은 필요하다. 다만 그 원칙만으로 접경의 지뢰, 방벽, 오인 사격, 서해 충돌 위험을 다룰 수는 없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다. 당시 합의는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의 큰 틀을 담았지만 충분히 이행되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문구를 그대로 되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북한의 달라진 노선과 접경의 군사적 현실을 반영한 새 남북 경계 관리 합의가 필요하다.
한국은 북한의 남부국경선을 국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평화가 관리되지는 않는다. 통일 원칙은 지키되 현실의 충돌을 막는 협상 전략이 필요하다. 북한의 일방적 국경화 공세는 분명한 위기다. 동시에 한국이 오래 미뤄온 과제를 다시 꺼내게 만든다. 분단된 두 정치체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충돌하지 않기 위한 최소 규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제 남북관계의 현실은 그 논의를 더 이상 미루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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