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고향, 부산 태종대

382

무더운 날씨에 드디어 입추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남보다 조금 예민한 사람이라면 ‘아침, 저녁의 공기가 이제 좀 견딜 만하구나’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견딜만한 공기라고 어렴풋이 감지했다면 ‘적당히 걷는’ 여행의 여유를 되찾아야 할 때다. 잊고 있었던 즐거움을 위해, 서늘한 산 속 길과 시원한 바다가 마주보는 부산 ‘태종대’를 소개한다.

#부산에도 섬이 있다

여행은 주로 ‘속세’에서 벗어나고 싶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생각나는, 일종의 탈출행위에 가깝다.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과연 속세의 이미지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부산으로의 여행을 선호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부산을 아직 잘 모르고 하는 편견에 가까운 생각이다.

부산에도 섬이 있다. ‘영도’라는 섬은 부산의 남포역에서 조금만 벗어나 시원하게 뻗은 영도대교 끝에 위치해 있다. 차를 타고 영도대교를 지날 때 잡힐 듯 보이는 바다가 여행의 시작을 알리면서, 한국 최고의 아름답고도 번잡한 항구도시에서 순식간에 벗어나고 있다는 묘한 일탈감이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도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다른 섬들과는 확실히 다른, 섬이 주는 순박함과 항구도시가 주는 생동력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저 멀리 산 능성이에 계단식 농업처럼 층층이 뿌리를 박고 소박하게 모여 있는 집들이 눈에 들어와 ‘벗어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여행의 목적지인 ‘태종대’는 영도의 남동쪽 끝에 위치하는 고도가 200m 쯤 하는 구릉지역으로 부산에서는 보기 힘든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유명해 경상도 내에서는 이미 소문이 자자한 곳이라고 한다. 잘 마련되어 있는 태종대 이정표를 따라 들어와 블록마다 잔디가 깔려 있는 널찍한 주차장에 마음 편히 차를 주차했다. 잔디가 깔린 주차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잔디는 인위적으로 태어났는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생긴 자연적인 현상인지 헛갈리게 할 정도로 주변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태종대에 도착한 순간, 태종대가 신라 태종무열왕의 사후 장소였다는 유래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 외에도 신선이 살던 곳이라 하여 신선대라고 불렸다는 속설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바다에서 밀려온 해무가 구름처럼 산 능성마다 걸쳐져 있는 모습이 신비롭다. 산 능성이뿐만 아니라 주변은 온통 해무로 자욱해 움직임 하나 하나해 서늘한 공기가 온 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 ‘다누비’ 타고 다 누비자!

태종대에는 순환 관광열차인 ‘다누비’가 있다. 태종대의 명물인 ‘영도등대’까지의 거리가 2Km 정도 되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가며 자연을 음미해도 나쁘지 않다. 울창한 숲이 만들어낸 그늘과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아무리 걸어도 땀에 흠뻑 젖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 차도와 인도로 따로 구분돼 있긴 하나, 널찍한 차도에는 태종대의 안내자 다누비 외에는 드나드는 차량이 없어 넓은 길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다누비의 좋은 점이 있다. 다누비를 이용하는 요금이 단지 1500원이라는 저렴함을 제쳐두더라도 열차에 탑승을 했더라도 지정한 다섯 군데 장소에서 언제든지 내릴 수 있으며, 타고 싶을 때는 돌아오는 열차에 다시 탑승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원할 때면 언제든지 몇 번이나 반복 할 수 있으니, 걷고 싶을 때는 걷고 타고 싶을 때 타는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런 훌륭한, 모양새마저도 혹하는 다누비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망설임 없이 티켓을 끊었지만, 늘어서 있는 줄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순환열차의 대기시간이 수요에 따라 잘 조정되는 까닭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그마한 열차 세 개가 대롱대롱 이어진 다누비의 창문은 반은 있고 반은 없어, 열차가 운행되는 내내 시원한 바람이 열차 안으로 끊임없이 불어왔다.

태종대 입구에서 1Km 정도 지나면 ‘남항 조망지’가 나온다. 남항 조망지는 입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다누비를 타다가 중간에서 내려 주변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남항 조망지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가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인상적인 자살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왜 별명이 자살바위라고 지어졌는지 보자마자 알정도로 그 기괴함이 위협적이다. 태종대 입구에서 올라 갈수록 자욱한 해무와 서늘한 바람의 농도가 짙어져, 걷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씻기는 땀에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든다.

외국관광객도 입소문을 듣고 많이 찾는 곳이라서 그런지 군데군데 이정표도 잘 마련돼 있고, 걸어가는 코스도 따뜻한 나무재질로 계단을 꾸며 이 곳 자연과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여행지 설명이 한글과 한자, 영문으로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비록 자그마한 섬이지만 세계적인 항 구도시 부산의 힘이 사소한 곳에서 발휘되는 순간이다. 남항 조망지에서는 영도의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말 그대로 ‘조망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바다를 이 보다 더 잘 조망할 수 있으랴. 독특한 포토존도 군데군데 많이 보인다. 선장 흉내를 내 보면서 힘껏 돌릴 수 있는 키부터 묘사가 디테일해 한눈에 봐도 눈치 챌 수 있는 해마 한 쌍까지. 이것들 외에도 바다를 모토로 한 다양한 조각들을 볼 수가 있어 눈이 심심하지 않다.

조망지도 좋지만 태종대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은 바로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도 등대’다. 조망지에서 다시 올라와 영도등대가 있는 전망대까지는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매우 가까운 거리다. 이쯤에서 다누비 순환열차를 기다렸다가 타고 올라가도 되고 산책하듯 걸어가도 되지만 팁을 말하자면, 시간이 지나 생각하면 언제나 현명한 선택이 되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방법이다. 영도등대로 내려가는 길은 조망지로 가는 길 만큼이나 완벽하다. 울창한 녹음에 어두운 산속 길, 행여 발을 헛디디기라도 할까봐 계단 마다 야광테이프를 붙여놓은 배려가 웃음을 자아낸다.

영도 등대에는 새롭게 단장한 볼거리들이 많았다. 갤러리와 도서관부터 해양 영상관, 자연사 전시실까지 개방형 해양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어쩔 수 없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그 위를 여유롭게 떠다니는 배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목적이 치열한 삶이냐 또는 여유이냐는 알 수 없지만, 평화로운 마음으로 거듭난 여행자의 마음대로 느끼는 것만큼은 막지 못하리라.

날씨가 좋은날 영도 등대 위에 선다면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일본의 대마도를 해상의 흑점처럼 희미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정말 운이 좋을 때, 바다가 보여주는 행운이다. 그러나 이날에는 날

씨에 따라 다섯, 여섯 개의 섬을 볼 수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오륙도를 볼 수 있었다.

영도 등대에는 국내 유명 버라이어티쇼에 나왔던 일명 ‘파라솔 횟집’이 명물로 알려져 있다.

파라솔 횟집이 무엇이냐. 이 횟집의 정체는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 등대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면 바다와 파도가 마주하는, 넓은 바위를 볼 수 있는데 그 위에 바로 파라솔만

<영도등대>

세워놓고 회를 파는 횟집이 있는 것이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코앞에서 바라보며 바다에서 이제 막 건져 올려 진 활어를 그 자리에서 먹는다. 이곳에서야 말로 ‘신선함’이라는 단어를 논해야 할 것이다.

신선한 회로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돌아갈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영도등대를 지나쳐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왔으니, 다시 그만큼을 올라가야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올라갈 때는 내려올 때만큼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었지만, 다누비를 타고서 이제는 익숙해진 태종대의 울창한 숲길을 되짚으며 처음에 도착했던 입구로 향했다.